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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산업 150년의 기록

인천 산업 역사 8편 - 부평은 왜 자동차 도시가 되었을까, 백마장과 교통 요충지의 탄생(1962)

by goldene 2026. 6. 19.

군수기지에서  자동차산업의 메카로 발전

 

안녕하세요, 인천에서 토지·공장·창고를 전문으로 다루는 황금공인중개사 대표 전기봉입니다.「인천은 어떻게 대한민국 산업의 심장이 되었는가 — 개항장에서 AI산업까지, 인천 산업 150년의 기록」 8편입니다.1편에서 제물포가 열렸고, 2편에서 경인선이 놓였으며, 3·4편에서 공장들이 들어섰습니다.5편에서 조병창이 세워졌고, 6편에서 철조망 안쪽 주인이 바뀌었으며, 7편에서 담장 밖 골목 경제가 살아났습니다.8편은 그 모든 것이 하나의 방향으로 수렴하는 순간입니다.길이 먼저였는가, 공장이 먼저였는가.부평은 — 그 질문의 답이다.

1960년대 부평 일대

 

 

 

백마장의 기억 — 말이 뛰던 벌판


백마장(白馬場).지금의 산곡동 입구 일대를 가리키는 옛 지명이다. 1940년 인천부에 편입되면서 백마정(白馬町)이라는 이름을 얻었고, 해방 후 산곡동으로 바뀌었다.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 넓고 평탄한 땅이었다.조병창 공사가 시작되던 시절, 백마장 인근에는 청부업체 현장사무소가 들어섰다. 군수 공사의 하도급 업체들이 이 일대에 먼저 자리를 잡은 것이었다. 

 

공장이 들어서기 전에 — 공장을 짓는 사람들이 먼저 왔다.1970~80년대까지 이 일대에는 방직·식품·기계 공장이 밀집해 있었다. 백마장이라는 이름은 사라졌지만, 그 땅의 성격은 달라지지 않았다. 넓고 평탄하며, 길과 가깝고, 물건을 만들기에 적합한 땅.땅의 기억은 이름보다 오래 남는다.

 

1960년대 인천 산곡동 일원

 

길과 산업 — 경인로가 먼저 뚫렸다


1936년 10월 23일.경인산업도로가 개통됐다. 지금의 경인로다.서울과 인천을 잇는 이 도로가 열리자, 부평은 단순한 농촌 외곽에서 수도권 물류 동선의 중간 거점으로 바뀌었다. 서울에서 인천항까지, 인천항에서 서울까지 — 모든 것이 이 길을 통했고, 부평은 그 길 위에 있었다.1967년 3월 24일, 경인고속도로 착공.1968년과 1969년에 걸쳐 개통이 완료됐다. 경인로와 경인고속도로, 경인선 철도. 세 개의 동맥이 부평을 관통했다.

 

어떤 공장이든 입지를 고를 때 가장 먼저 보는 것이 있다. 원자재가 들어오는 길, 완제품이 나가는 길. 부평은 1960년대 말, 그 두 가지를 동시에 갖춘 몇 안 되는 도시가 됐다.길이 공장을 불렀다. 그리고 가장 먼저 응답한 것이 — 자동차였다.

 

 

교통요충지 부평 — 새나라자동차가 선택한 이유


1962년 8월 27일.새나라자동차 부평공장 준공식이 열렸다.같은 해 11월, 닛산 블루버드 생산이 시작됐다. 초기 연산 능력 6,000대. 1963년까지 2,773대가 이 공장에서 나왔다.왜 부평이었는가.경인로가 있었고, 경인선이 있었으며, 항만까지 이어지는 물류망이 있었다. 넓은 부지를 확보하기 용이했고, 군수 납품으로 단련된 금속 가공 인력이 인근에 집적되어 있었다. 

 

새나라자동차가 부평을 선택한 것은 — 부평이 이미 준비된 땅이었기 때문이다.1965년 신진자동차가 이 공장을 인수했다. 공장은 165만 2천㎡ 규모로 확장됐고, 도요타와 합작해 퍼블리카·코로나·크라운을 생산했다. 한반도 최초의 본격적인 자동차 생산 기지가 부평에 뿌리를 내리는 순간이었다.

 

1962년 부평 새나라 자동차 준공식 장면

 

산업축 형성 — 숫자가 말하는 30년


숫자로 보면 이렇다.1961년: 부평 공장 36개, 직공 1,495명,1970년: 부평산단 입주 50개 기업, 수출액 인천 전체의 42.5%, 1970년대 말: 부평 공장 105개, 1992년: 부평산단 입주 공장 1,063개36개에서 1,063개로.30년 만에 29배였다. 이것이 자동차 도시 부평의 성장 속도다.자동차 공장 하나가 도시를 바꾼다는 말이 있다. 

 

완성차 공장이 들어서면 부품 협력업체가 따라오고, 협력업체가 들어서면 소재·가공 업체가 따라오며, 그 연쇄가 도시 전체의 산업 구조를 재편한다.부평이 정확히 그 경로를 걸었다.1960년대 군납 납품으로 단련된 금속 가공 공장들이 자동차 협력업체로 전환됐고, 경인로와 경인고속도로가 부품과 완성차를 실어 날랐으며, 백마장 일대의 평탄한 땅이 공장 부지로 채워졌다.길과 땅과 사람이 — 한 방향을 향했다.

 

 

자동차산업의 전조 — 부평이 선택받은 이유

 

돌아보면 필연이었다.1936년 경인로가 뚫렸고, 1939년 조병창이 들어섰으며, 1945년 미군이 주둔했다. 1962년 새나라자동차가 왔고, 1965년 신진자동차가 확장했으며, 1970년 부평산단이 인천 수출의 42.5%를 책임졌다.어느 하나가 없었다면 다음이 없었다.경인로가 없었다면 새나라자동차가 부평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고, 조병창이 없었다면 금속 가공 인력이 집적되지 않았을 것이며, 철조망 안의 군수 납품 경험이 없었다면 자동차 부품 협력업체로의 전환이 이렇게 빠르지 않았을 것이다.

 

부평의 자동차 도시化는 —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1936년부터 쌓인 것들이 1962년에 터진 것이었다.2025년 현재, 인천 안에는 GM·현대·기아 납품업체 511곳이 자리를 잡고 있다. 그 511곳의 뿌리를 따라가면 — 백마장의 평탄한 벌판과, 경인로의 첫 아스팔트와, 36개 공장 1,495명의 직공에 닿는다. 땅은 기억한다. 길도 기억한다. 그 위에 선 것들이 — 다음을 만든다.

 

 

부평GM공장 전경



다음 편 예고

 

9편 — 대우자동차가 만든 도시
신진자동차가 씨앗을 심었다면, 대우자동차는 그 도시를 완성했다. 전성기의 부평, 협력업체의 성장, 그리고 그 모든 것이 흔들리기 시작한 순간까지 — 자동차 도시 부평의 절정과 균열을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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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공인중개사  대표  전기봉   /  토지   공장    창고  전무  /  인천  수도권 전문



1936년 경인로가 뚫리고, 1962년 새나라자동차가 부평을 선택했다. 36개 공장에서 1,063개로, 30년 만에 29배. 길이 산업을 만든 도시 — 부평의 기록.

 

2026.06.17 - [인천 산업 150년의 기록] - 인천 산업 역사 9편 - 부평을 먹여 살린 자동차, 신진·새한·대우 30년의 기록(1962)

 

인천 산업 역사 9편 - 부평을 먹여 살린 자동차, 신진·새한·대우 30년의 기록(1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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