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평 애스컴(ASCOM), 그리고 기지촌이라 불리우던 곳의 아픈 기억
안녕하세요, 인천에서 토지·공장·창고를 전문으로 다루는 황금공인중개사 대표 전기봉입니다.「인천은 어떻게 대한민국 산업의 심장이 되었는가 — 개항장에서 AI산업까지, 인천 산업 150년의 기록」 7편입니다.1편에서 제물포가 열렸고, 2편에서 경인선이 놓였으며, 3·4편에서 공장들이 들어섰습니다.5편에서 조병창이 세워졌고, 6편에서 철조망 안쪽 주인이 바뀌었습니다.7편은 그 철조망 바깥의 이야기입니다.기지가 만든 경제가 있었다. 그런데 — 기지 밖에서도 경제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미 육군 군수지원사령부(Army Service Command). 줄여서 애스컴이라 불리우던 기지는 단순한 군부대가 아니었다. 병원,보급창,통신대,포로수용소 등 무려 7개의 캠프가 모인 규모로 훗날 시티(City)를 더하여 애스컴 시티라 불리웠었다. 담장 안에서 달러가 흘러나왔다. 담장 밖에서 - 그 달러를 받아내는 사람들이 있었다.담장 밖 경제 — 기지가 새어나오는 방식철조망은 완벽하지 않았다.어떤 철조망도 완벽하지 않다.
안에서 밖으로, 밖에서 안으로, 사람과 물건과 돈이 스며든다. 캠프마켓도 마찬가지였다.미군 기지에는 PX(Post Exchange, 군 면세점)가 있었다. 담배, 술, 통조림, 의류, 생활용품이 시중가의 절반 이하로 풀렸다. 그것이 기지 밖으로 나오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경로는 단순했다. 기지에서 일하는 한국인 노무자, 카투사, 기지 주변 상인. 이들이 PX 물자를 바깥으로 연결하는 통로가 됐다. 불법이었지만 — 단속보다 수요가 컸다.부평 텍사스골목은 그 수요 위에서 태어났다.

미군문화 유입 — 골목이 언어를 바꿨다
텍사스골목이라는 이름은 어디서 왔는가.정확한 기원은 기록마다 다르다. 미군들이 이 골목을 텍사스처럼 거칠고 자유로운 곳이라 불렀다는 설이 있고, 골목 분위기가 미국 서부를 닮았다 하여 붙었다는 설도 있다.이름의 기원보다 중요한 것은 — 그 골목이 무엇을 했느냐다.텍사스골목은 부평 최초의 달러 경제 구역이었다. 미군을 상대하는 클럽과 바, PX 물자를 거래하는 가게, 군복을 개조해 파는 옷가게, 미제 통조림을 쌓아둔 잡화점. 한국어와 영어가 섞였고, 원화와 달러가 함께 돌았으며, 낮과 밤의 경계가 희미했다.한국전쟁(1950~53년) 이후 피난민이 부평으로 몰려들었다. 그들 중 일부가 이 골목에서 생계를 찾았다. 텍사스골목은 전쟁이 만든 피난처이기도 했다.

클럽과 상권 — 신촌이 다른 방식으로 자랐다
텍사스골목이 달러 직거래의 공간이었다면, 신촌은 조금 달랐다.부평 신촌 상권은 기지 노무자와 한국군, 인근 공장 노동자들이 뒤섞이는 소비 공간으로 발달했다. 클럽과 식당, 여관과 다방. 군수 납품 공장이 돌아가는 낮이 끝나면 — 신촌의 밤이 시작됐다.이 두 상권은 각자의 방식으로 부평 경제를 떠받쳤다.수치로 보면 이렇다. 1960년대 부평 소재 요식업·숙박업 사업체 수는 인천 전체에서 가장 높은 밀도 중 하나였다. 제조업 도시가 서비스업 밀집 지역을 동시에 품고 있는 구조였고 —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캠프마켓이었다.기지가 없었다면 달러가 없었고, 달러가 없었다면 텍사스골목도 신촌도 없었다.

도시문화의 변화 — 골목이 도시를 가르쳤다
텍사스골목이 부평에 남긴 것은 상권만이 아니었다.문화가 스며들었다. 재즈와 로큰롤이 클럽에서 흘러나왔고, 미제 청바지와 나일론 재킷이 골목을 걸었으며, 햄버거와 핫도그가 부평에서 처음 팔렸다. 1950~60년대 부평은 서울보다 먼저 미국 소비문화를 경험한 도시였다.그것이 마냥 좋은 것은 아니었다.기지촌 경제가 동반하는 어두운 면이 있었다. 성매매 산업이 형성됐고, 불법 물자 거래가 일상화됐으며, 법 바깥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늘었다. 텍사스골목의 역사를 '달러 경제의 활력'으로만 읽는 것은 — 절반만 읽는 것이다.역사는 빛과 그림자를 같이 기록해야 한다.
부평의 또 다른 역사 — 골목이 남긴 것
텍사스골목은 지금도 부평에 있다.이름은 같지만 성격이 바뀌었다. 미군 상대 클럽과 PX 거래상 대신, 외국인 노동자를 위한 식당과 식료품점이 들어섰다. 손님이 바뀌었고 언어가 바뀌었으며, 달러 대신 다른 나라 화폐들이 돌고 있다.골목은 달라졌지만 — 골목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았다. 주류 경제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모여 살아가는 공간. 텍사스골목은 1953년에도 그랬고, 2026년에도 그렇다.
부평은 이런 도시다.공장 도시이면서 상권 도시였고, 군수 도시이면서 문화 도시였으며, 낮에는 제조업이 돌아가고 밤에는 골목 경제가 돌아갔다. 그 두 개의 엔진이 동시에 돌아갔기 때문에 — 부평이 이 자리까지 왔다.캠프마켓이 걷힌 지금, 텍사스골목은 다시 변하는 중이다.440,000㎡가 새로운 용도를 기다리고 있고, 그 결정이 인근 상권과 토지 가치를 다시 움직일 것이다. 골목의 역사를 아는 사람이 — 다음 골목의 가치를 먼저 읽는다.땅은 기억한다. 골목도 기억한다. 기억하는 자가 — 먼저 본다.

다음 편 예고
8편 — 백마장에서 자동차 도시로, 길이 산업을 만드는가, 산업이 길을 만드는가. 부평에는 그 답이 있다.
1960년대 교통의 요지가 된 부평이 어떻게 자동차 도시로 변해갔는지 — 백마장의 기억부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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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미군이 캠프마켓에 주둔하면서 부평에는 두 개의 경제가 생겼다. 철조망 안의 군수물자와, 철조망 밖 텍사스골목의 달러 경제. 그 골목이 부평 상권의 뿌리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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