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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산업 150년의 기록

인천 산업 역사 5편 - 부평은 왜 군수도시가 되었을까, 조병창과 1만명의 기억(1939)

by goldene 2026. 6. 17.

 

강제동원 노동자들의 집단 거주지이자 수탈의 배후지에서 군수도시로

 

 

안녕하세요, 인천에서 토지·공장·창고를 전문으로 다루는 황금공인중개사 대표 전기봉입니다.「인천은 어떻게 대한민국 산업의 심장이 되었는가 — 개항장에서 AI산업까지, 인천 산업 150년의 기록」 5편입니다.1편에서 제물포가 열렸고, 2편에서 경인선이 놓였으며, 3·4편에서 공장들이 들어섰습니다. 5편은 그 흐름이 전혀 다른 방향으로 꺾이는 순간입니다. 1939년, 부평. 공장은 이번에 — 전쟁을 위해 지어졌습니다.

 

개화기 부평 조병창 일원


공장은 물건을 만드는 곳이다. 그런데 그 물건이 총이었다.

 

공장은 물건을 만드는 곳이다. 그런데 그 물건이 — 총이었다.1883년 제물포가 열리면서 인천에는 탄산수 공장이 들어섰고, 성냥 공장이 들어섰으며, 술도가와 제분 공장이 자리를 잡았다. 사람들의 입을 채우고 손을 따뜻하게 하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1939년, 부평에 들어선 공장은 달랐다. 그것은 사람을 죽이는 물건을 만드는 곳이었다.인천 산업 150년의 역사에서 이 장은 — 가장 어두운 페이지다. 

 

일제 강점기 인천 부평 일원

 

일제강점기 부평 — 논밭이었던 땅에 굴뚝이 섰다

 

1939년 이전, 부평은 논밭이었다. 드넓은 평야와 낮은 구릉이 이어지는 조용한 농촌이었고, 인천 중심부에서 벗어난 외곽이었으며, 특별할 것이 없는 땅이었다.그 땅을 일제가 주목한 이유는 세 가지였다. 첫째, 인천항과 경인선이 가까워 군수물자 수송이 쉬웠고, 둘째, 분지 지형이라 연합군의 공습을 피하기 유리했으며, 셋째, 넓은 평야가 있어 대규모 시설을 짓기에 충분했다. 전략적 조건이 맞아떨어졌고, 그래서 일제는 이 조용한 농촌을 선택했다.1939년. 조선인 1만 명이 동원됐다. 논밭이 파헤쳐졌고, 공장이 세워지기 시작했으며, 부평은 불과 5년 만에 전혀 다른 도시가 됐다.

 

일제 강점기 인천 부평 일원

 

군수공장의 집결 — 인천육군조병창의 탄생

 

1939년 착공, 1941년 개창. 인천육군조병창(仁川陸軍造兵廠) 제1 제조소가 부평에 문을 열었다.조병창(造兵廠)이란 무엇인가. 군대에서 사용하는 병기와 탄약을 제조하는 국가 시설이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한 공장이 아니었고, 일제 태평양전쟁 수행의 핵심 병참 기지였으며, 부평이 그 중심이 됐다.생산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기록이 남아 있다.

 

1945년 조선군 잔무정리부가 작성한 자료에 따르면 월 생산량이 이러했다. 소총 4천 정, 총검 2만 진, 소총 실탄 70만 발, 대포용 환 3만 발, 군도 2천 진, 차량 200량. 한 달에 소총 4천 정이었고, 실탄 70만 발이었으며, 이것이 전쟁터로 실려 나갔다.조병창이 가동되자 부평의 인구가 급격히 불어났다. 기술을 배우려는 조선인들이 몰려들었고, 징병을 피하려는 조선인들도 이주해 왔으며, 그들이 부평 이주민 1세대를 형성했다. 전쟁이 사람을 모았고, 그 사람들이 훗날 부평이라는 도시를 만들었다.

 

일본 조병창 병원

 

 미쓰비시 사택 — 공장 옆에 도시가 생겼다

 

조병창만이 아니었다. 미쓰비시(三菱) 등 일본 군수 대기업들이 부평에 잇따라 들어섰고, 공장 주변에는 일본인 기술자와 관리자들을 위한 사택 단지가 조성됐으며, 그래서 부평은 공장 도시이자 사택 도시가 됐다.미쓰비시 사택 단지는 지금의 캠프마켓 부지와 인접한 지역에 조성됐다. 잘 정돈된 주택들이 줄지어 섰고, 일본인들의 생활 시설이 갖춰졌으며, 그 옆에서 조선인 노동자들은 전혀 다른 환경에서 살았다. 같은 공장에서 일했지만 — 퇴근 후의 세계는 달랐다.

 

인천이 대륙병참기지화가 되면서 부평뿐 아니라 인천 전역에 중공업·군수공업·운수업·창고업 시설이 들어섰고, 시가지는 해안 매립과 도로 확장으로 공업지대화됐다. 탄산수 공장과 성냥 공장으로 시작했던 인천의 공업 역사가 — 전쟁 물자 생산으로 전환된 것이었다.

 

미쯔비시 사택 단지

 

전쟁과 산업 — 수탈이 남긴 역설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왔다. 일본인들이 떠났고, 조병창 가동이 멈췄으며, 공장들이 문을 닫았다.그리고 인천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인천상공회의소사의 기록이 이렇게 남아 있다. "인천은 일제의 전쟁수행을 위한 군수공장이 많아 광복 직후에는 항만의 하역업을 제외하고는 다른 산업기반이 거의 없었다.군수공장들이 사라지자 — 산업 자체가 사라진 것이었다.


6·25 한국전쟁이 터졌고, 인천상륙작전으로 시가지와 항만과 산업시설이 큰 피해를 입었으며, 황해도를 중심으로 북쪽 피난민이 대량 유입됐다. 인천은 국내 어느 도시보다 혹독하게 분단의 비극을 겪었다.그런데 역설이 있다. 수탈의 도구였던 군수 공업화가 — 훗날 인천 산업단지화의 토양이 됐다. 이미 닦인 도로, 이미 들어선 항만 시설, 이미 형성된 노동력. 조병창이 만든 인프라가 1960~70년대 부평수출공단과 주안산단, 남동산단의 기반이 됐다. 역사는 이렇게 —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도 흐른다.

 

광복 직후 인천 일대

 

산업도시의 탄생 — 전쟁이 남긴 것들


조병창 터는 광복 이후 미군이 접수했고, 그것이 캠프마켓(ASCOM)이 됐으며, 80년 가까이 부평 한복판을 막아섰다. 2023년 말 D구역 반환으로 전체 53만㎡가 시민에게 돌아왔고, 지금 인천시는 이 땅 위에 신촌문화공원 조성을 추진하고 있다.조병창이 서 있던 자리가 공원이 된다. 총을 만들던 땅이 사람들의 쉼터가 된다. 거기에는 일제강점기 조병창 건물과 한국전쟁 이후 미군 주둔 건축물이 함께 남아 있어 역사의 층위가 겹쳐 있다.

 

부평은 이렇게 만들어진 도시다. 논밭이었다가, 군수 공업지대가 되었다가, 전후 수출 공단이 됐다가, 자동차 도시가 됐으며, 지금은 그 모든 역사의 흔적 위에 새 공원을 짓고 있다. 어느 도시가 이런 층위를 갖고 있는가.땅은 기억한다. 그 땅 위에 서는 것들이 달라질 뿐이다.

 

인천 부평 캠프마켓 전경


다음 편 예고

 

6편 — 캠프마켓이 남긴 것
1945년 일본이 떠난 자리에 미군이 들어왔고, 53만㎡가 80년 동안 잠겨 있었으며, 2023년 마지막 열쇠가 돌아왔다. 그 땅은 지금 무엇이 되려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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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공인중개사  대표  전기봉  / 토지  공장   창고  전문  / 인천 수도권 전

 


 

1939년 논밭이었던 부평에 조병창이 들어섰다. 소총 4천 정, 실탄 70만 발. 5년 만에 군수도시가 된 부평 — 전쟁이 남긴 것들과 그 땅이 걸어온 80년의 기록.

 

2026.06.16 - [인천 산업 150년의 기록] - 인천 산업 역사 4편 - 성냥 공장의 불꽃

 

인천 산업 역사 4편 - 성냥 공장의 불꽃

안녕하세요, 인천에서 토지·공장·창고를 전문으로 다루는 황금공인중개사 대표 전기봉입니다.「인천은 어떻게 대한민국 산업의 심장이 되었는가 — 개항장에서 AI산업까지, 인천 산업 150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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