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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산업 150년의 기록

인천 산업 역사 4편 - 성냥 공장의 불꽃

by goldene 2026. 6. 17.

안녕하세요, 인천에서 토지·공장·창고를 전문으로 다루는 황금공인중개사 대표 전기봉입니다.「인천은 어떻게 대한민국 산업의 심장이 되었는가 — 개항장에서 AI산업까지, 인천 산업 150년의 기록」 4편입니다.3편에서 항구가 공장을 낳았습니다. 탄산수가 터지고 술이 빚어지고 밀가루가 쏟아졌으며, 4편은 그 공장들 사이에서 가장 뜨겁게 타올랐던 불꽃 하나의 이야기입니다. 성냥 한 개비. 그리고 그것을 만든 손들.


 

개화기 조선인촌주식회사

 

불을 만드는 공장이 있었다. 그 공장 안에서 다른 불이 켜졌다.

 

불을 만드는 공장이 있었고, 그 공장 안에서 — 다른 불이 켜졌다.1917년 10월 4일, 인천 동구 송림동에 조선인촌주식회사(朝鮮燐寸株式會社)가 문을 열었다. 燐寸 — 도깨비불 인(燐), 마디 촌(寸). 조선 사람들에게 성냥은 아직 도깨비불이었고, 손가락 하나 긁으면 불이 나왔으며, 신기했고 두려웠지만 없어서는 안 됐다.그 공장에서 43년 동안 불꽃이 타올랐다. 성냥개비의 불꽃만이 아니었고, 여공들의 가슴속에서 타오른 또 다른 불꽃이 있었다.

 

개화기 마을 골목길 풍경

 

배다리와 공장 — 서민의 골목에 굴뚝이 섰다 

 

배다리. 인천 동구 금곡동·창영동 일대를 부르는 순우리말 이름이다.지금은 완전히 육지가 됐지만, 본래 이곳은 만석동 물길을 따라 수문통으로 이어지는 갯골이었고, 밀물 때가 되면 어선과 상선들이 이 안까지 들어와 정박했다. 배들을 다리처럼 길게 연결하거나 배 위에 나무다리를 걸쳐 사람과 짐을 날랐으며, 그래서 이 땅의 이름이 '배다리'가 됐다. 한자로는 선교리(船橋里)라 썼다.

 

1883년 제물포 개항 이후 신포동·송학동 일대에 각국 조계지가 설정되면서 원래 개항장 주변에 살던 조선인들이 삶의 터전을 빼앗겨 밀려난 곳이 바로 이 배다리였고, 갯골을 중심으로 야시장과 시장이 서면서 인천 민초들의 중심지이자 민족 상권의 뼈대가 됐다.그리고 1899년, 경인선이 부설되면서 배다리 갯골 위로 철로가 지나갔고, 대대적인 매립 공사로 바닷길이 끊기면서 완전히 육지가 됐다. 바닷길은 사라졌지만 사통팔달의 교통 요충지가 된 이 땅 위에 — 1917년 조선인촌주식회사가 들어섰다. 갯골이 공장 터가 되기까지, 30년이 걸렸다.

 

개화기 거리 풍경

 

 성냥산업의 성장 — 하루 2만 7천 갑, 전국을 밝히다

 


창업 초기 남녀 직원 500명으로 시작했고, 1930년대 후반에는 공장 노동자 800명에 부업 종사자 2,800명, 하청 가구 500여 곳으로 불어났으며, 하루 생산량 2만 7,000갑으로 국내 소비량의 약 20퍼센트를 담당했다.패왕표(霸王標)에는 사자를, 향로표(香爐標)에는 향로를, 쌍학표(雙鶴標)에는 두 마리 학을 새겼으며, 세 종류의 상표가 전국 방방곡곡으로 팔려 나갔다. 

 

창업 25년 만에 전국 성냥 생산량의 70퍼센트 이상을 차지했으니, 대한민국 성냥의 역사는 사실상 이 공장 하나의 역사였다.

성냥갑을 만드는 하청은 인근 500여 가구에 뿌려졌고, 배다리 골목 어머니들이 성냥갑을 풀로 붙였으며, 공장 안에서 성냥개비를 만드는 동안 공장 밖 골방에서는 성냥갑이 만들어졌다. 공장 하나가 동네 하나를 먹여 살렸다. 아니, 동네 하나가 공장 하나를 떠받쳤다.

 

향로표 성냥


   

삼원표 성냥



여공들의 삶 — 하루 13시간, 1만 개의 껍질

 

공장 노동자의 대다수는 배다리 일대에 살던 가난한 집안의 소녀들과 여공들이었고, 날카로운 칼날에 나무를 깎으며 인(燐) 성분의 매연을 마셨으며, 기계화가 되지 않은 시절이었기에 성냥개비를 성냥갑에 넣는 일은 전부 손으로 해야 했다. 1931년 8월 26일 자 동아일보가 세 번째 동맹파업을 보도하면서 남긴 기록이 있다. 하루 13시간 노동에 성냥껍질 1만 개, 그리고 평균임금 1원 70전.


여기서 놀라운 사실 하나가 있다. 그 1원 70전은 같은 해 대전에서 최고임금을 받던 목수의 하루 임금 80전보다 두 배나 많았고, 그래서 높은 임금이었다.그러나 그들은 파업했다.돈이 전부가 아니었기 때문이고, 하루 13시간이 전부가 아니었기 때문이며,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감당해야 했던 차별과 폭언과 — 몸이 망가져도 보상받지 못하는 구조가 그들을 거리로 나서게 만들었다.

 

조선인촌주식회사 성냥공장 작업 현장

 

산업화의 그림자 — 세 번의 파업, 한 번도 쉽지 않았다


1920년대부터 시작됐고, 임금 인상과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동맹파업이 수차례 이어졌으며, 1931년에는 세 번째 파업이 터졌다.파업은 단순한 임금 투쟁이 아니었고, 일제강점기 만연했던 조선인 착취에 경종을 울리는 민족 저항운동이었으며, 그래서 인천 성냥공장 여공들의 투쟁은 — 조선인이 조선 땅 위에서 조선인으로 살아남으려는 싸움이었다.


그러나 파업이 끝나면 공장은 다시 돌아갔고, 성냥개비는 다시 깎였으며, 껍질은 다시 붙여졌다. 승리도 패배도 명확하지 않은 채로 여공들은 다시 자리에 앉았고, 역사는 이 여공들의 이름을 대부분 기록하지 않았다. 기록된 것은 파업 건수와 임금 수치뿐이었으며, 그 숫자 뒤에 있었던 손들은 — 이름 없이 사라졌다.

 

1931년 8월 26일자 동아일보 기사

 

노동의 역사 — 불꽃은 꺼지지 않았다


1945년 광복이 왔고, 일본인 카레이에이타로가 떠났으며, 공장은 폐업했다. 그러나 끝이 아니었다.한국전쟁 이후 그 공장에서 일했던 노동자들이 다시 모였고, 새로운 성냥공장을 세웠으며, 전력이 부족하던 시절 성냥은 집들이 선물이었고 영화 홍보 수단이었으며 생활의 필수품이었다. 그들은 다시 불꽃을 만들었다.


그러나 1960년대 라이터가 등장했고, 중국산 성냥이 밀려들었으며, 그렇게 성냥의 시대가 저물었다. 조선인촌주식회사의 터에는 새 건물이 섰지만, 지금 그 터 옆에 배다리성냥마을박물관이 있어 기억을 붙잡고 있다.


인천상공회의소 사는 이 시기를 이렇게 기록했다. "1917년 인천 송림동에 문을 연 조선인촌주식회사로부터 파생된 인천 근대화의 상징 — 성냥공장 아가씨." 아가씨라는 단어가 당시에는 비하의 뉘앙스로 쓰였지만, 지금은 다르게 읽힌다. 그 아가씨들이 — 인천 노동운동의 씨앗이었고, 배다리 여공들의 파업이 훗날 동일방직으로, 대우자동차로, 인천 노동운동의 긴 강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불꽃은 손에서 시작됐다. 그리고 꺼지지 않았다.

 

인천 동구 금곡동 조선인촌주식회사 옛 터
인천 동구 금곡동 조선인촌주식회사 옛 터 옆에 자리한 배다리 성냥마을 박물관


다음 편 예고

 

5편 — 부평은 왜 군수도시가 되었을까
1939년. 인천 부평. 일제가 조선인 1만 명을 동원해 하나의 거대한 군수기지를 만들었고, 소총 4천 정에 실탄 70만 발을 쏟아냈으며, 공장은 때로 전쟁을 위해서도 지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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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인천 송림동 성냥공장. 하루 13시간, 1만 개의 껍질. 세 번의 파업. 이름 없이 사라진 여공들의 이야기 — 인천 노동운동의 불꽃이 여기서 시작됐다.

 

2026.06.16 - [인천 산업 150년의 기록] - 인천 산업 역사 3편 - 사이다 한 병이 시작한 근대 공업(1892~1950)

 

인천 산업 역사 3편 - 사이다 한 병이 시작한 근대 공업(1892~1950)

공업도시로의 진화 촉매제 사이다 안녕하세요, 인천에서 토지·공장·창고를 전문으로 다루는 황금공인중개사 대표 전기봉입니다.「인천은 어떻게 대한민국 산업의 심장이 되었는가 — 개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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