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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산업 150년의 기록

인천 산업 역사 3편 - 사이다 한 병이 시작한 근대 공업(1892~1950)

by goldene 2026. 6. 16.

공업도시로의 진화 촉매제  사이다

 

 

안녕하세요, 인천에서 토지·공장·창고를 전문으로 다루는 황금공인중개사 대표 전기봉입니다.「인천은 어떻게 대한민국 산업의 심장이 되었는가 — 개항장에서 AI산업까지, 인천 산업 150년의 기록」 3편입니다.1편에서 제물포가 열렸고, 2편에서 경인선이 놓였습니다. 이제 그 항구와 철도 위에서 — 공장이 태어납니다. 3편은 쌀 한 톨과 탄산 한 모금이 만든 인천 근대 공업의 이야기입니다.


 

항구로 쌀이 들어왔다. 쌀이 술이 됐다. 술이 공업이 됐다.

개항기 연자방아

 

항구로 쌀이 들어왔다. 쌀이 술이 됐다. 술이 공업이 됐다.그리고 어느 날, 탄산이 터졌다.인천 근대 식품 공업의 계보는 이 한 문장으로 압축된다. 1889년 정미소 하나가 인천 중구 중앙동에 문을 열었다. 아무도 몰랐다. 그 정미소 한 채가 이후 60년에 걸쳐 소주 공장을 낳고, 막걸리 공장을 낳고, 사이다 공장을 낳고, 제분 공장을 낳을 것이라는 것을. 항구는 단순히 물건이 오가는 곳이 아니었다. 항구는 산업의 어머니였다.

 

개항기 미곡 선적

 

개항장의 식문화 — 쌀의 도시가 된 인천

 

1883년 제물포가 열리자 인천은 조선 최대의 미곡 집산지가 됐다. 전국의 쌀이 경인선을 타고 인천으로 모였고, 인천항을 통해 일본으로 빠져나갔다. 쌀이 모이는 곳에는 반드시 그것을 가공하는 시설이 따라온다.1889년 3월. 인천 중구 중앙동 4가. 일본인 신토오 시카노스케(進藤鹿之助)가 인천정미소(仁川精米所)를 열었다. 국내 최초로 확인되는 기계식 정미소다. 다만 이것은 아직 개량 현미 도정 방식이었다. 흙 맷돌을 개량한 수준이었다.


진짜 혁명은 3년 후였다.
1892년. 미국인 월터 타운센드(W.D. Townsend)가 증기(스팀) 동력 정미기 4대를 들여왔다. 미국에서 특허를 받은 최신식 기계였다. 이름하여 타운센드 정미소, 인천 사람들이 '담손이 방앗간'이라 부른 곳. 한국 역사상 최초로 깨끗한 백미(白米)가 대량으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증기가 쌀을 깎았다. 근대가 밥상에 올라온 것이다.

 

개항기 담손이 정미소

 

사이다의 등장 — 혀 위에 올라온 근대

 

쌀이 쏟아지자 다음 차례는 음료였다.1905년 2월. 인천 화정 2 정목(현 중구 신흥동 해광사 인근). 일본 상인 히라야마 마쓰타로(平山松太郞)가 인천탄산수제조소를 열었다. 미국식 제조기와 5마력 발동기. 국내 최초의 사이다 — 별표사이다(성인 샴페인 사이다) — 가 탄생했다.탄산이 입 안에서 터지는 그 순간, 조선 사람들은 처음으로 혀 위에 근대를 느꼈다. 신기했을 것이다. 두려웠을 것이다. 그리고 — 중독됐을 것이다.


인천탄산수제조소는 이후 경인합동음료로 이어졌다. 광복 직후까지 전국 12개 청량음료 업체 중 인천의 스타사이다와 평양의 금강사이다가 최고로 꼽혔다. 
"인천 앞바다에 사이다가 떴어도~"라는 만담 만요가 괜히 나온 것이 아니었다. 인천은 사이다의 도시였다.그러나 1950년 5월 9일. 서울에서 동방청량음료합명회사가 칠성사이다를 출시했다. 칠성이 대히트를 쳤다. 인천의 스타사이다는 뒤로 밀렸다. 시장은 언제나 이렇게 — 갑자기, 냉정하게 바뀐다.

 

경인사이다 상표

 

제분공장과 양조장 — 쌀이 낳은 산업 벨트

 

타운센드 정미소의 백미가 쏟아지자 자연스럽게 다음 산업이 따라왔다. 쌀로 만드는 것들. 술과 빵과 밀가루.양조업의 탄생1906년. 인천 송월동. 조일양조주식회사(아사히 양조장)가 문을 열었다. 이후 1919년 도원동으로 이전하며 규모를 키웠다. 남한 최초이자 전국 최대 규모의 기계식 소주 대량 생산 공장. 오늘날 우리가 마시는 희석식 소주의 모태가 된 곳이다. 1926년. 인천 배다리 창영동. 황해도 출신 상공인 최병두가 인천양조장(합명회사)을 세웠다. 인천의 간판 막걸리 소성주(邵城酒)의 고향이다. 지금은 공장 가동이 멈추고 인천문화양조장으로 재생되어 시민들의 공간이 됐다. 술도가가 문화공간이 되기까지 — 100년이 걸렸다.1928년. 인천 중구 외리(현 경동). 객주 출신 최승우가 대동양조조합을 열었다. 명물 성학소주를 생산해 멀리 중국까지 수출했다.

 

[대동양조조합 설립 연도는 자료에 따라 1899년 설과 1928년 설이 혼재한다. 이 글에서는 언론 보도 기준 1928년을 따른다.]  

 

 제분업의 도착

 

1935년. 인천 월미도 매립지. 일본 미쓰이 그룹의 일본제분이 인천공장을 세웠다. 1952년 한국인 이한원에게 불하되면서 대한제분(주)이 창립됐다. 1957년 신관 공장을 신축하며 동양 제일의 단일 제분 공장으로 성장했다.정미소가 쌀을 깎고, 양조장이 쌀로 술을 빚고, 제분 공장이 밀을 가루로 만들었다. 항구 하나가 식품 공업 벨트 전체를 만들어냈다.

 

근래 인천 양조장 전경

 

공업의 태동 — 1912년 비누, 그리고 경공업의 집적

 

식품만이 아니었다.1912년 송월동에 애경사가 생기면서 비누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개항장에서 처음 수입품으로 들어왔던 비누가 — 이제 인천에서 직접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수입에서 생산으로. 소비에서 제조로. 그것이 근대 공업의 전환점이다. 1931년 만주사변 이전까지 정미소, 양조장, 성냥공장 등 소비재 산업이 주가 되었다. 정미·양조·성냥·비누. 모두 일상의 물건들이다. 거창한 중공업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 소박한 경공업들이 인천의 공장 문화를 만들었다. 공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노동자가 어떻게 일하는지, 제품이 어떻게 팔리는지 — 인천은 이 시기에 그것을 배웠다. 항만 축조와 철도 공사를 위해 인천으로 노동자들이 모이고 무역 및 상업의 발달로 공장이 건설되었다. 사람이 모이면 공장이 생기고, 공장이 생기면 더 많은 사람이 모인다. 인천은 이 순환 구조를 가장 먼저 경험한 도시였다.

 

 

인촌 설냉 공장 작업자들

 

항구도시의 경쟁력 — 왜 공장은 인천을 선택했는가 

 

이쯤에서 하나의 질문이 생긴다.왜 하필 인천이었는가.1889년 인천정미소, 1892년 타운센드 정미소, 1905년 인천탄산수제조소, 1906년 조일양조, 1912년 애경사 비누, 1917년 조선인촌 성냥, 1926년 인천양조장, 1928년 대동양조, 1935년 일본제분. 40년 사이에 이 모든 공장이 인천을 선택했다. 이유는 하나였다. 세 가지가 동시에 있었기 때문이다.

 

★ 항구 — 원료가 들어오는 문

★ 철도 — 제품이 나가는 길

 

★ 노동자 — 공장을 채우는 사람

 

 

항구만 있으면 물건이 쌓인다. 철도만 있으면 물건이 지나간다. 노동자만 있으면 물건을 만들 수 있다. 이 세 가지가 동시에 갖춰진 곳 — 그것이 인천이었다. 공장은 조건이 갖춰진 곳에 자연스럽게 들어선다. 1889년에도, 1935년에도, 그리고 1960년대 남동산단이 만들어질 때도 — 논리는 같았다.씨앗이 상처 난 땅에서 잘 자란다고 했다. 1883년 제물포의 개항은 상처였다. 그러나 그 상처 위에서 — 밥이 지어지고, 술이 빚어지고, 탄산이 터졌다.그렇다면 지금 이 땅 위에서, 다음 공장은 무엇을 만들고 있는가.

 

인천항 배후단지


 

다음 편  예고

 

4편 — 성냥공장의 불꽃, 1917년. 인천 동구 송림동. 800명의 공장과 2,800명의 골방. 패왕표·향로표·쌍학표. 하루 2만 7천 갑. 그 성냥을 만든 손들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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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9년 정미소 하나가 인천에 문을 열었다. 그 한 채가 사이다 공장을 낳고, 소주 공장을 낳고, 막걸리 공장을 낳았다. 항구가 공업을 만든 40년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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