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평을 집어삼킨 거대한 미군 기지
안녕하세요, 인천에서 토지·공장·창고를 전문으로 다루는 황금공인중개사 대표 전기봉입니다.「인천은 어떻게 대한민국 산업의 심장이 되었는가 — 개항장에서 AI산업까지, 인천 산업 150년의 기록」 6편입니다.1편에서 제물포가 열렸고, 2편에서 경인선이 놓였으며, 3·4편에서 공장들이 들어섰습니다. 5편에서 그 공장이 — 전쟁을 위한 것이었음을 보았습니다.6편은 그 전쟁이 끝난 직후의 이야기입니다.1945년, 일본이 떠났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 다른 군대가 들어왔습니다.

광복 이후 — 총 대신 달러가 들어왔다
1945년 8월 15일, 조병창의 굴뚝이 멈췄다.일본인 기술자들이 짐을 쌌고, 소총 생산 라인이 멈췄으며, 1만 명이 일하던 공장에 침묵이 내려앉았다.그리고 한 달 뒤, 미군이 들어왔다.일제가 세운 조병창 부지를 미군이 접수했다. 이름이 붙었다. 애스컴(ASCOM, Army Service Command). 미 8군 군수지원사령부. 한반도에서 가장 많은 군수물자가 통과하게 될 기지의 이름이었다.철조망은 그대로였다. 안쪽 주인만 바뀌었다.

미군 주둔 — 604,938㎡ 가 잠기다
애스컴이 차지한 땅은 604,938㎡였다.부평 한복판이었다. 도시가 그 주위를 돌아서 자랄 수밖에 없는 위치였다.한국전쟁(1950~53년)이 터지자 애스컴의 규모와 기능이 폭발적으로 커졌다. 전방에 보낼 군복, 식량, 탄약, 차량 부품이 이 기지를 거쳐 나갔다. 부평은 다시 한번, 전쟁의 후방 기지가 됐다.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기지 바깥에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군수물자 기지 — 철조망 바깥이 공장이 됐다
1961년 기준, 부평 소재 공식 공장(직공 5인 이상)은 36개였고, 직공 합계는 1,495명이었다.작은 숫자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36개 공장이 무엇을 만들고 있었는지를 보면 달라진다. 군복 봉제, 식품 가공, 금속 절삭, 포장재. 대부분이 기지 납품 구조와 연결되어 있었다.국가가 설계한 산업단지가 들어서기 이전이었다. 정부 계획 이전에, 시장이 먼저 움직인 것이었다.그 시장을 만든 것은 — 철조망 안의 수요였다.

부평 경제 변화 — 2년 만에 12배
1966년 9월, 인천시가 부평공단 조성 공사를 시작했다.1968년, 부평의 수출액은 인천 전체의 3.5%였다.그리고 1970년.
부평산단에 입주한 50개 기업의 수출액이 — 인천 전체의 42.5%를 차지했다.3.5에서 42.5로. 2년 만의 일이었다.기적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그러나 기적은 아무 데서나 일어나지 않는다.1961년부터 군납으로 단련된 금속 가공 공장이 있었고, 숙련된 직공이 있었으며, 납품 시스템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산단이 씨앗을 심은 것이 아니라 — 이미 자라 있던 나무에 울타리를 친 것이었다.
캠프마켓의 유산 — 70년이 지나 철조망이 걷혔다
1973년, 애스컴이 캠프마켓(Camp Market)으로 이름을 바꿨다.기지의 규모는 줄었지만 — 땅은 그대로였다.2019년 12월, 1차 반환.2023년 12월, 2차 반환으로 전체가 완료됐다.반환공여구역 440,000㎡를 포함한 604,938㎡가 70년 만에 부평 시민에게 돌아왔다.그러나 땅이 돌아왔다고 바로 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70년간 군수물자를 다룬 땅이었다. 토양 정화 비용이 구역별 최소 수백억 원, 누적으로 1,000억 원 이상으로 보도됐다.돌아온 땅을 쓰기 위해 — 다시 돈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 땅은 지금 도시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440,000㎡를 어떻게 쓸 것인가. 공원인가, 산업인가, 복합개발인가.그 답이 정해지는 순간, 부평역 반경 1㎞ 안의 땅값이 움직인다.1962년 한국 GM(신진자동차)이 들어서고, 2022년까지 60년간 중형차를 만들었으며, 지금도 인천 안에는 GM·현대·기아 납품업체 511곳이 자리를 잡고 있다.부평이 이 자리까지 온 것은 — 조병창이 닦은 길 위에서였다.
총을 만들던 땅이 자동차를 만드는 도시가 됐고, 군수 납품 공장이 수출 제조업으로 전환됐으며, 이제 그 모든 흔적 위에 새 공원을 짓고 있다.철조망이 걷혔다. 그 안에서 무엇이 자랄지는 — 이제 우리 차례다.땅은 기억한다. 그 땅 위에 무엇을 세울지는 — 지금 사람이 결정한다.
다음 편 예고
7편 — 텍사스골목과 신촌의 밤
철조망 바깥, 또 다른 경제가 있었다. 달러가 흘러나오는 골목이 있었고, 미군문화가 스며드는 상권이 있었으며, 부평은 낮과 밤이 전혀 다른 도시였다. 담장 밖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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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일본이 떠난 자리에 미군이 들어왔다. 604,938㎡가 70년간 잠겼고, 그 바깥에서 부평의 제조업이 자랐다. 3.5%에서 42.5%로, 2년 만에 인천 수출의 중심이 된 도시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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