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 1월 5일의 책자 한 권
1962년, 가난이 설계했던 기적의 설계도는 과연 어떻게 대한민국 경제 성장의 중심이 되었을까요? 구로공단, 울산, 구미, 남동산단, 주안산단 등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앞으로 어떻게 변해가는지를 알아가는 과정, 그것이 바로 이 시리즈의 핵심 질문입니다. 그 질문을 풀려면 먼저 1962년 1월 5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날 정부는 국가의 운명을 바꿀 책자 한 권을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제목은 단출했습니다. 바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었습니다. 두께는 묵직했습니다.
그 안에는 목표 성장률 7.1%, 수출 1억 19백만 달러, 그리고 기간산업 40여 개 육성 계획이 빼곡히 들어있었습니다. 당시 국내외 전문가 대부분은 혀를 찼습니다. '지나치게 의욕적'이라고, '달성 가능성에 회의적'이라고 말입니다. 당연한 반응이었습니다. 1961년 대한민국의 수출액은 고작 41백만 달러였고, 1인당 국민소득은 100달러 미만이었습니다.
그해 주요 수출품 1위가 중석(텅스텐 광석)이었고, 2위가 생사(生絲)였습니다. 공장다운 공장조차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해냈습니다. 아니, 정확히는 공장을 먼저 만들었기 때문에 해낼 수 있었습니다. 그 공장들이 모인 곳이 바로 산업단지였고, 그 산업단지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의 도시 풍경을 결정했습니다.

1962년 제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시작 배경
1950년대 대한민국 경제의 가장 큰 고민은 단순했습니다. 당시 우리는 미국이 주는 원조 물질로 먹고살다시피 했습니다. 실제로 1957년 미국의 대한 무상원조는 3억 83백만 달러로 정점을 찍었으나, 그 이후 미국의 국제수지 악화와 재정 적자가 겹치며 해마다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1961년, 미국은 "원조를 무상에서 유상 차관으로 전환하겠다"는 공식을 대한민국에 통보했습니다.
원조가 줄어든다는 것은 단순한 재정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나라의 생존 방식 자체를 통째로 바꿔야 한다는 청천벽력 같은 신호였습니다. 이제는 '받아서 먹는 경제'에서, 무언가를 '만들어서 파는 경제'로 체질을 개선해야만 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1960년의 4·19 혁명과 1961년의 5·16 군사정변이 잇따라 터졌습니다. 극심한 정치적 혼란 속에서 새롭게 들어선 권력은 자신들의 정당성을 증명할 강력한 무기가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그 정당성의 이름은 바로 '경제'였습니다. 그 시절 혁명공약은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한다"며 노골적으로 민생을 외쳤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정치적 약속이 아니라, 국가가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생존 선언이었습니다.

수출산업공업단지 개발조성법과 산업단지 설계의 본질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6대 중점 과제를 살펴보면 첫째가 에너지원 확대, 셋째가 기간산업 확충, 다섯째가 수출 증대였습니다. 이 세 가지 핵심 과제가 유기적으로 맞물려 돌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공장이 필요했습니다. 그것도 전국에 흩어진 개별 공장이 아닌, 전력과 도로, 항만 인프라를 공유하며 효율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 '한곳에 모인 공장들'이 절실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대한민국 산업단지 설계의 본질이었습니다.
마침내 1964년 9월 14일, 법률 제1656호로 '수출산업공업단지개발조성법'이 공포되었습니다. 오늘날 매년 9월 14일로 지정된 '산업단지의 날'의 유래가 바로 이 법안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대한민국 정부가 내놓은 이 법안의 핵심은 크게 세 가지 파격적인 장치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첫째는 공단 전체를 단일 '보세구역'으로 지정해 원자재를 무관세로 수입·가공한 뒤 수출할 수 있도록 비용을 대폭 낮춘 것입니다. 둘째는 '수출 실적이 있는 자'에게만 입주 자격을 부여해 공단 전체를 철저한 수출 전진기지로 유도했습니다. 마지막 셋째는 개발공단의 법인세, 영업세, 등록세, 취득세, 재산세를 전면 면제하여 민간 자본이 공업단지 개발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강력한 유인을 제공했습니다.
무관세 혜택과 철저한 수출 의무, 그리고 파격적인 세제 감면이라는 세 가지 축이 맞물리면서 대한민국 공업단지는 단순한 공장 집합소를 넘어 수출을 위한 최초의 특별경제구역으로 거듭났습니다. 가난했던 1964년의 대한민국이 만들어낸, 당시로서는 상상 이상으로 꽤 정교하고 영리한 마스터플랜이었습니다.

인천 부평공단과 주안산단의 역사 (소금밭의 변신)
1963년 9월, 인천 부평의 유지들이 모였다. 이름하여 '금요회'. 이후 '부평진흥회'로 개편된 이들은 정부를 향해 탄원서를 올렸다. 부평을 별도 공업지대로 지정해 달라고.국가가 설계하고 민간이 따라간 게 아니었다. 민간이 먼저 움직이고, 국가가 그 방향을 제도로 굳혔다.부평의 강점은 명확했다.일제강점기 군수공업의 흔적이 남아 있어 노동 숙련도가 있었다.
경인고속도로, 인천항, 부평변전소, 부평정수장—인프라가 갖춰져 있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인천항까지 거리가 불과 25km. 물건을 만들어 배에 싣기까지의 동선이 짧았다.1965년 6월 16일, 부평지역이 수출공단으로 지정됐다. 같은 해 11월 23일, 인천수출산업공단 정식인가. 이것이 현재 한국수출(부평) 국가산업단지의 출발이었다.
그리고 1969년, 주안 염전이 공단이 됐다.소금을 만들던 땅 위에 기계공장과 전자공장이 들어섰다. 수출이 소금을 대체했다.이것이 한국수출(주안) 국가산업단지, 5·6단지의 탄생이었다.1970년, 부평산단에 입주한 50개 기업의 수출 실적은 인천 전체 수출액의 42.5%를 차지했다.1968년 당시 3.5%였던 것이 단 2년 만에 42.5%로 뛰었다.
공단이 도시를 바꿨다. 부평역 앞 상권이 폭발했다. 전국에서 사람이 몰려들었다. 자동차 산업의 신진자동차, 한국베어링, 일진금속, 삼익악기— 이름만 들어도 그 시대가 보이는 기업들이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구로에서 구로공단 1단지가 가동을 시작한 것이 1967년 4월 1일이었다.
준공식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말했다."허허벌판을 불도저로 밀어붙인다고 수출 공장이 되겠냐며 의심한 사람도 많았지만 우리는 결국 해냈다." 맞는 말이었다. 다만 '우리'가 누구였는지는, 역사가 더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1966년 12월, 구로공단에 입주한 동남전기가 최초로 139,893달러의 트랜지스터 라디오와 TV 수상기를 일본으로 수출했다. 그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 앞에 선 것은 전국에서 상경한 10대 후반, 20대 초반의 여성 노동자들이었다.
그들은 누군가에 누나였고 동생이었으며, 어떤 이에게는 이모 나 고모였다.그들이 받은 1980년대 초 월급봉투에는 이것저것 떼고 74,166원이 찍혀 있었다.그마저도 고향에 보냈다. 오빠의 대학 등록금, 부모의 의료비, 여동생의 학비. 대한민국의 수출 신화는 이들의 손으로 만들어졌다.

공장이 부르면 도시가 왔다
1970년대 서울의 공장들이 넘쳐나기 시작했다. 수도권정비계획법은 이에 대응해 수도권을 세 개 권역으로 나눴다.과밀억제권역—인구와 산업이 지나치게 집중되어 이전하거나 정비할 필요가 있는 지역. 서울과 인천 구도심이 여기 들어갔다.성장관리권역—과밀억제권역에서 이전하는 인구와 산업을 계획적으로 유치하는 지역. 인천 대부분과 경기도 서부·남부가 여기였다. 자연보전권역—한강 수계와 자연환경을 보전하는 지역.
이 법이 만든 구조가 공장의 방향을 결정했다. 서울에서 밀려난 공장들이 갈 곳은 이미 설계되어 있었다. 인천이었다.그리고 1980년 7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상임위원회는 결정을 내렸다. 인천 남동구 남촌동, 논현동, 고잔동 일원—폐염전 부지에 새로운 공단을 조성하겠다고.1985년 4월 20일 착공. 1989년 12월 29일 준공. 총 조성면적 9,574,050㎡.
남동국가산업단지.수도권 용도지역 위반 공장들을 이전시키기 위해 만든 공단이었다. 그런데 40년이 지난 지금—8,165개사, 종업원 7만 명. 소금밭과 폐염전의 운명이 이렇게 바뀌었다. 구로에서 시작해 부평으로, 주안으로, 남동으로. 공단이 이동할 때마다 도시가 따라왔다. 공단이 이동한 자리에 일자리가 생겼고, 일자리가 있는 곳에 사람이 모였고, 사람이 모인 곳에 식당·상가·학교·병원이 생겼다.산업단지는 단순한 공장이 아니었다.
도시 생성 엔진이었다.

공인중개사가 본 남동산단 용지 가치와 산집법 규제
다년간 인천 산업단지 현장을 발로 뛰어온 공인중개사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부평·주안·남동산단 용지의 가치는 처음부터 '위치'에 있지 않았다. 국가가 설계한 구조에 있었다.1964년 법이 만든 세 가지 보호막을 보면 답이 정확하다.보세구역으로 원자재 비용을 낮췄다. 입주자격 제한으로 실수요 제조업체만 들어오게 했다. 세금 면제로 개발 참여를 유인했다.이 세 가지가 산업단지 용지를 일반 공업용지와 구별하는 자산으로 만들었다.
투기적 진입이 차단되고, 실수요 제조업체만 들어오니 산업 생태계가 유지됐다. 생태계가 유지되니 수요가 안정됐고, 수요가 안정되니 용지 가격도 받쳐졌다.2026년 현행 산집법(산업집적활성화 및 공장설립에 관한 법률)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제39조·제43조의 3은 산업단지 용지 처분을 제한한다. 공장설립 완료 신고 전 처분 시 관리기관 양도 의무. 위반 시 재산가액의 20% 이행강제금.이 규정이 불편해 보이지만, 역설적으로 이것이 산업단지 용지의 가치를 지키는 방패다.
그리고 2026년부터 산집법 제33조에 의해 관리기본계획에 재생에너지·수소에너지 전환이 의무 포함 사항이 됐다. 공장은 이제 단순히 물건을 만드는 곳이 아니라, 에너지를 어떻게 쓰는지를 증명해야 하는 공간이 됐다.1964년의 법이 '수출'을 기준으로 공단을 설계했다면, 2026년의 법은 '에너지'를 기준으로 공단을 재설계하고 있다. 60년이 지났지만 법이 공단을 설계한다는 원칙은 변하지 않았다.

소금밭의 네 번째 생애
인천은 이 과정을 세 번 반복했다.갯벌 → 수출공단(부평, 1965). 염전 → 수출공단(주안, 1969). 폐염전 → 중소기업 이전 공단(남동, 1985).그리고 이제 네 번째가 시작되고 있다.2023년 부평·주안 스마트그린산단 지정. 2024년 노후거점산단 경쟁력강화사업지구 선정. 총사업비 3,250억 원. 60년 된 공단을 디지털·저탄소 첨단산단으로 전환하는 실험이 진행 중이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 짚어야 할 게 있다.인천 제조업이 GR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991년 45.2%에서 2021년 26.5%로 절반 가까이 떨어졌다. 30년 동안 제조업 비중이 이렇게 빠르게 줄어든 광역시는 인천이 유일하다.동시에 인천 제조업 종사자 비중은 여전히 전 산업 중 1위(20.2%)다.이 두 숫자가 동시에 사실이다.
제조업은 위축되고 있지만, 여전히 인천 경제의 심장이다. 쇠퇴하는 심장 앞에 선택지는 두 가지다. 교체하거나, 강화하거나,노후거점산단법이 선택한 답은 교체가 아니라 강화다.제조업을 버리고 서비스업·IT를 채우는 구로 방식이 아니라, 제조업을 지키면서 기술 수준을 올리는 인천 방식.맞는 방향인지는 앞으로 10년이 판단할 것이다.다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1962년의 계획이 1989년의 남동산단을 만들었다. 2024년의 계획이 2040년의 인천을 만들 것이다.공단을 읽으면 도시가 보이고, 도시를 읽으면 부동산의 미래가 보인다.
구로에서 공장이 떠났다. 부평으로, 주안으로, 남동으로 밀려갔다.
그런데 구로의 그 공장들은 왜 하필 '그곳'을 떠났고, 왜 하필 '인천'으로 왔는가.

제1막 2편 — 구로공단은 어떻게 제조업의 심장이 되었는가,
그리고 왜 그 심장이 멈췄는가.다음 편에서, 그 이동을 추적한다.대한민국 수출 신화의 실제 엔진이었던 여공들의 이야기, 그리고 그 이동이 인천 부동산 지도에 남긴 영구적인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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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6.20 - [대한민국 산업단지의 흥망성쇠] - 구로공단은 어떻게 제조업의 심장이 되었는가 - 그리고 왜 그 심장은 인천으로 이식됐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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