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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산업단지의 흥망성쇠

구로공단은 어떻게 제조업의 심장이 되었는가 - 그리고 왜 그 심장은 인천으로 이식됐는가

by goldene 2026. 6. 20.

1967년 4월 1일, 허허벌판에 사이렌이 울렸다

 

1967년 4월 1일.서울 구로동, 준공식장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말했다."허허벌판을 불도저로 밀어붙인다고 수출 공장이 되겠냐며 의심한 사람도 많았지만 우리는 결국 해냈다."맞는 말이었다.다만 '우리'가 정확히 누구였는지는, 그날 준공식에 초대받지 못한 사람들이 더 잘 알고 있었다.구로공단 1단지. 서울 구로동 한켠, 경인선 철도와 경인가도가 교차하는 저지대 논밭이었다. 항만(인천항)까지 25km, 노동력은 인근 영등포에서 끌어올 수 있었다. 

 

땅값은 쌌다. 조건은 맞아떨어졌다.1963년 부지 선정, 1964년 수출산업공업단지개발조성법 제정,1966년 착공, 1967년 준공.법이 만들어지고 공단이 가동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3년이었다.첫 가동 기업 12개사. 종업원 합계 2,460명.그리고 1966년 12월, 동남전기가 트랜지스터 라디오와 TV 수상기를 일본으로 수출했다. 금액은 139,893달러. 대한민국 수출산업공단 최초의 수출 실적이었다.그 컨베이어 벨트 앞에는 전국에서 상경한 10대 후반, 20대 초반의 여성들이 서 있었다.

 

1967년 4월 27일 구로동 수출산업공업단지 준공식 모습

 

컨베이어 벨트 앞의 대한민국

 

1970년대 구로공단의 풍경은 이랬다.새벽 5시, 구로역 앞 골목에 도시락을 든 행렬이 길게 늘어섰다. 공장 기숙사 4~6인 1실. 세면대 하나를 열 명이 나눠 썼다. 오전 7시 30분 출근, 오후 10시 퇴근. 잔업이 있으면 자정을 넘겼다.월급봉투에 찍힌 숫자는 1980년대 초 기준 74,166원이었다.이것저것 떼고 남은 돈이었다. 그마저도 고향에 보냈다. 오빠의 대학 등록금, 부모의 의료비, 여동생의 학비.


사람들은 이들을 '공순이'또는 '공돌이'라고 불렀다. 가볍게, 그리고 무심하게.그러나 숫자는 가볍지 않았다.1971년 구로공단 수출 1억 달러 돌파. 1977년 국가 전체 수출 100억 달러 달성 당시 구로공단 단독 수출액 11억 달러. 전체의 11%. 1978년 말 근로자 11만 4천 명—가동 초기의 43배.1988년 수출 40억 달러. 구로공단 역대 최고점.대한민국 수출 신화의 실제 엔진은 구로동 골목의 그 손들이었다. 그 손들이 받은 74,166원이 쌓이고 쌓여 1988년 40억 달러가 됐다.그런데 그 엔진이 1988년을 정점으로 식기 시작했다.
  
   

1978년 구로공단 공장 내 작업현장

 

구로가 멈춘 이유

 

구로공단이 쇠퇴한 이유를 한 단어로 압축하면 '비용'이다.1987년 노동자 대투쟁. 전국 3,337건의 파업. 임금이 오르기 시작했다. 연평균 15~20%.섬유·봉제·가발·신발— 구로공단의 주력 업종들은 노동집약적이었다. 인건비가 올라가면 버틸 수 없는 구조였다.동시에 수도권정비계획법이 조여들었다.법 제7조는 과밀억제권역(서울 전역 포함)에서 공업지역 신규 지정을 금지했다. 

 

공장이 새로 들어올 수 없었다. 기존 공장들은 확장도, 신설도 막혔다.1988년 40억 달러를 찍은 수출액은 1999년 15억 달러로 추락했다. 11년 만에 절반 이하.공장들이 짐을 쌌다. 목적지는 두 갈래였다.인천·경기도, 또는 중국·동남아.처음에는 인천으로 왔다. 나중에는 더 멀리 떠났다.

 

서울 구로 디지털 단지 전경

 

 

공장은 짐을 싸서 인천으로 왔다

 

구로에서 남동까지는 직선거리 약 25km.트럭 한 대면 이틀이면 이사가 됐다. 그러나 이 25km의 이동이 만들어낸 결과는 단순한 공장 이전이 아니었다.수도권정비계획법 제6조가 설계한 구조를 보면 이해가 된다.과밀억제권역(서울·인천 구도심)에서 밀려난 공장들은 성장관리권역(인천 대부분·경기도 서부)으로 이동해야 했다.

 

갈 곳이 법으로 이미 설계되어 있었다.1985년 착공한 남동국가산업단지가 1989년 준공됐다. 타이밍이 맞아떨어졌다. 구로에서 나온 공장들이 남동으로 들어갔다. 인천 부평·주안의 기존 산단도 업종이 바뀌었다. 섬유·봉제가 빠진 자리에 기계·전자·자동차부품이 채워졌다.


인천 남동산단 업종 변화가 이를 증명한다.
2000년 기계업종 비중 44.5% → 2022년 50.3%. 오히려 늘었다.구로가 비워낸 것을 인천이 받아 키웠다.구로에서는 쇠퇴였던 것이 인천에서는 성장이었다.같은 공장 이전 사건이 출발지와 도착지에 정반대의 결과를 만들었다.

 

 

빈 공장이 남긴 것들

 

2000년 9월, 구로공단은 '서울디지털산업단지'로 이름을 바꿨다.지식산업센터가 들어섰다. IT·게임·소프트웨어 기업들이 채워졌다. 2015년 기준 입주 기업 9,726개사, 근로자 16만 명. 전성기 구로공단의 1.4배가 넘는 인원이 같은 자리에서 일하고 있다.숫자만 보면 성공이다.그런데 일자리의 성격이 달라졌다.제조업 일자리는 중졸 학력의 노동자도 접근할 수 있었다. 지식산업 일자리는 대졸 이상을 요구했다. 

 

공간은 업그레이드됐지만, 그 공간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의 범위가 좁아졌다.'공돌이' '공순이'라 불리던 이들이 일하던 자리에 지금은 게임 개발자가 앉아 있다.틀렸다는 게 아니다.다만 그 전환에서 무언가가 사라졌다는 것—그것을 기억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이 문제다.한편 남동산단 입주기업의 매출액은 비입주 기업 대비 최근 10년간 상대적으로 더 크게 감소했다.(한국은행 인천본부, 2022) 구조고도화 없이 유지만으로는 한계가 온다는 경고였다.

 

인천 산단의 전경

 

구로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인천이 구로와 다른 길을 선택했다는 것은 2024년 수치에서 확인된다.부평·주안 경쟁력강화사업지구 선정, 총사업비 3,250억 원. 제조업을 버리고 IT를 채운 게 아니었다. 제조업을 지키면서 디지털·저탄소 기술을 입히는 방향이었다.노후거점산단법 제12조가 그 법적 근거다. 입주업종의 고부가가치화, 기반시설 유지·보수·확충, 근로자 생활환경 개선,  공장만 고치는 게 아니라 사람이 일할 수 있는 환경을 함께 만들겠다는 의도가 담겨 있다.

 

다년간 현장을 뛰어보고 겪어본 공인중개사의 입장에서  본다면, 산업단지 용지의 장기 가치는 그 단지가 어떤 방향으로 전환되느냐에 달려 있다. 구로는 제조업을 버리고 지가를 올렸다. 인천은 제조업을 지키면서 기술을 올리려 하고 있다.어느 쪽이 맞는지는 시장이 판단할 것이다.다만 구로가 가르쳐준 교훈 하나는 분명하다.공장이 떠난 자리는 쉽게 채워지지 않는다. 채워진다 해도, 채워지는 데 10년이 걸린다. 그 10년 동안 주변 상권이 죽고, 인구가 빠지고, 부동산 가격이 주저앉는다.공단을 지키는 것은 낭만이 아니다. 계산이다.


 

 

구로에서 부평으로, 주안으로, 남동으로.공장은 이동했다. 그런데 울산은 달랐다.울산은 공장이 온 게 아니었다. 처음부터 도시가 공장을 위해 설계됐다.제1막 3편 — 울산은 어떻게 자동차 도시가 되었는가.논밭과 어촌이었던 울산이 세계 최대 단일 공장 도시가 된 과정, 그리고 단일 기업이 도시 하나를 지탱할 때 생기는 명과 암을 추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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