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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을 보는 눈

계약금은 약속이 아니라, 약속을 깨는 값입니다

by goldene 2026. 8. 15.

광복절 아침, 말복은 어제로 지났고 처서는 아직 여드레 남았다. 계약의 세계에서도 날짜는 그냥 흘러가지 않는다. 특약에 적힌 기한 하루, 이행의 착수로 인정되는 시점 하나가 계약의 운명을 가른다. 

 

「땅을 보는 눈」은 지난 편에서 등기부의 세 방 — 표제부, 갑구, 을구 — 을 열어 권리관계를 확인하는 법을 다뤘다. 권리관계가 깨끗한 땅을 확인했다면, 이제 계약서 앞에 앉을 차례다. 

 

오늘은 그 자리에서 가장 먼저 오가는 돈, 계약금을 다룬다. 마음이 급한 쪽이 먼저 돈을 건넨다. 그러나 그 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급한 마음이 가르쳐주지 않는다.

 

수산동 토지

 

1.   계약금은 계약 그 자체가 아니다

 

계약금을 건네면 계약이 성립됐다고 믿는 사람이 많다. 틀린 믿음은 아니지만, 정확한 믿음도 아니다. 계약금은 계약 그 자체가 아니다. 그러나 일단 계약이 성립하고 계약금이 지급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민법 제565조는 계약 당시 지급한 계약금 등을 특별한 약정이 없는 경우 해약금으로 보아, 일정한 요건 아래 계약을 해제할 수 있도록 한다. 

 

매수인이 지급한 계약금을 포기하면 매수인은 계약을 해제할 수 있고, 매도인은 받은 계약금의 배액을 상환하면 계약을 해제할 수 있다. 계약금은 약속을 확정하는 돈이 아니라, 약속을 깨는 값을 미리 정해둔 돈이다.

다만 이 권리는 무한하지 않다. 상대방이 이행에 착수한 뒤에는 해제할 수 없다는 단서가 같은 조문에 붙어 있다. 중도금 지급이나 소유권 이전을 위한 구체적인 이행행위가 시작되면 계약금만 포기하거나 배액을 돌려주는 방식의 해제가 어려워질 수 있다. 

 

다만 '이행의 착수' 여부는 계약의 내용과 당사자의 실제 행위를 종합하여 개별적으로 판단한다. 중도금 지급은 대표적인 판단 요소 중 하나일 뿐, 중도금이라는 이름만으로 모든 경우에 이행의 착수가 인정되는 것은 아니다.

 

 

2.   가계약금이라는 이름의 착각

 

 "가계약금만 걸어두겠습니다"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법률 용어가 아니다. 실무에서 매수 의사를 붙잡아두기 위해 소액을 먼저 보내는 관행일 뿐이다.

문제는 이 가계약금이 실제로는 계약금과 같은 힘을 갖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데 있다. 가계약금이라는 이름만으로 법적 성격이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목적물과 매매대금 등 중요 사항에 합의하여 본계약이 이미 성립했는지, 또는 정식 계약을 앞두고 우선적으로 거래를 진행하기 위한 합의였는지, 

 

그리고 가계약금을 포기하거나 배액을 반환하기로 한 해약금 약정이 있었는지를 당사자의 의사와 계약 경위 등을 종합하여 판단한다. 이름을 가볍게 붙였다고 책임까지 가벼워지지는 않는다.

 

 

3.   특약이 없으면, 구두 약속은 없던 일이 된다

 

계약서에 없는 약속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중에 증명하기 어려워진다. 전화 통화였는지, 문자였는지, 카카오톡이었는지, 중개대상물 확인·설명서나 계약서 특약에 남아 있는지에 따라 분쟁의 양상이 달라진다. 산업용 부동산 거래에서 특히 자주 다투는 지점이 특약 누락이다.

토지거래허가구역 내 필지는 일반적인 매매계약과 법적 구조 자체가 다르다. 허가 전 계약은 확정적으로 유효하거나 확정적으로 무효인 상태라기보다, 허가를 받으면 소급하여 유효하게 될 수 있는 이른바 유동적 무효 상태로 설명된다. 

 

따라서 당사자에게는 허가 절차에 협력할 의무가 문제 될 수 있지만, 허가 전 계약의 이행관계를 일반적인 매매계약과 동일하게 볼 수는 없다. 협력의무와 이행의무를 구별하지 않으면, '허가가 안 나면 계약금을 돌려받는다'는 단순한 문구만으로는 실제 분쟁을 다 감당하지 못한다. 

 

허가 불허 시 계약금 반환의 범위와 절차를 구체적으로 정해두는 특약이 필요하다.

대출을 받아 잔금을 지급하는 것이 계약의 중요한 전제라면, 대출 불승인 또는 예상보다 현저히 부족한 대출이 발생했을 때의 처리 방법을 계약서에 미리 정해두는 것이 안전하다. 

 

실측 결과 등기부상 면적과 차이가 나올 경우의 정산 방식, 지상 지장물·폐기물 철거 책임의 소재도 특약으로 못 박아야 할 항목이다.

 

AI가 만든 계약서

 

4.   산업용 부동산에만 붙는 특약

 

공장·창고·산업단지 매물에는 일반 토지와는 다른 특약이 필요하다. 매도인이 말하는 '전기 ○○kW'와 실제 계약전력·수전설비 용량·현재 사용전력은 서로 다른 개념일 수 있다. 

 

계약 전에는 전기사용계약과 수전설비 현황을 확인해야 한다. 실제 계약전력, 수전설비 상태, 한국전력공사와의 계약관계, 명의변경 가능 여부, 미납금, 시설 상태까지 함께 확인해야 한다. 폐수배출시설은 산집법만의 문제가 아니다 — 물환경보전법 등 환경 관련 인허가·신고 사항과 명의변경 절차를 별도로 확인해야 한다. 

 

전기·폐수·가스 등 주요 기반시설의 인허가 및 계약관계는 각각 해당 기관과 법령에 따라 승계·변경 가능 여부를 확인해야 하며, 산업단지 입주계약은 입주계약 변경·신규 입주계약 등 필요한 절차(승인 불허 시 계약 해제 조건 포함)를 별도로 밟아야 한다. 

 

이 지점들은 산집법(산업집적활성화 및 공장설립에 관한 법률)과 관리기관 내규, 개별 환경 법령이 겹치는 구간이라, 특약에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으면 잔금 직전 분쟁의 씨앗이 된다.

 

 

 5.   잔금일, 책임의 경계선을 긋는 날

 

잔금을 치르는 날은 소유권만 넘어가는 날이 아니다. 그날을 기준으로 무엇이 매도인 책임이고 무엇이 매수인 책임인지, 경계선이 그어지는 날이다. 

 

산업용 부동산 실무에서는 다음 항목들이 특히 자주 분쟁으로 번진다 — 폐기물과 환경오염, 폐수처리시설의 상태, 불법 증축과 미등기 건축물, 밀린 전기요금·가스요금·관리비·산업단지관리비, 각종 체납금, 남겨진 기계설비의 소유권, 기존 임차인의 보증금 반환 책임, 기존 사업자의 인허가와 행정처분 이력등.

이 중에서도 폐기물·환경오염 문제는 계약금의 규모를 훨씬 넘어서는 비용 부담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 계약금은 수천만 원인데, 잔금 후 발견된 폐기물이나 환경문제로 그보다 훨씬 큰 비용이 발생하는 상황도 배제할 수 없다. 잔금일 이전 현장 확인과 책임 소재를 특약에 명시하는 일이, 계약금 액수를 정하는 일보다 중요할 때가 많다.

 

남촌동 토지

 

계약서에 도장을 찍기 전,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것

 

1.   지금 건네는 돈이 '가계약금'이라는 이름만으로 법적 책임이 가벼워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가

2.   토지거래허가·대출승인·인허가 중 하나라도 불확실하다면, 해당 조건부 해제 특약이 계약서에 명시되어 있는가

3.   실측 면적이 등기부 면적과 다를 경우의 정산 방식이 숫자로 적혀 있는가

4.   산업단지 입주계약 변경·신규 입주계약 절차, 전기·폐수·가스 등 기반시설의 승계·변경 여부가 특약에 구체적으로 담겨 있는가

5.   잔금일 기준 폐기물·환경오염·불법증축·미등기 건축물·체납금·기계설비 소유권·임차인 보증금의 책임 소재가 명시되어 있는가

6.   이행의 착수가 인정된 이후에는 계약금 포기·배액상환만으로 해제가 어려워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특약서에 진짜로 넣어야 할 문장

 

좋은 계약서는 분쟁이 생기지 않는 계약서가 아니다. 분쟁이 생겨도 답이 이미 적혀 있는 계약서다. 

 

다만 계약금이 언제나 '약속을 깨는 값'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당사자 사이의 약정, 계약의 내용, 이행의 착수 여부에 따라 법적 효과가 달라진다. 계약금은 마음을 잡아두는 돈이 아니라, 마음이 바뀌었을 때 치러야 할 값을 미리 정해둔 돈이다. 

 

그 값을 정확히 알고 서명하는 사람과, 급한 마음에 서명부터 하는 사람 사이의 차이는 계약금을 낼 때가 아니라, 계약이 틀어졌을 때 드러난다.

다음 편은 계약의 성립 자체를 흔들 수 있는 문제, 토지거래허가구역을 다룬다. 허가 대상인지 모르고 계약부터 한 경우,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짚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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