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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질의 서재 -산업용 부동산 이슈

도시는 바다를 삼켰다 - 다만 이름만 살아 돌아왔다

by goldene 2026. 4. 27.

갯벌의 어구

 

땅은 기억하지 않는다. 다만 이름이 기억한다. 호구포(虎口浦) — 범의 입이라는 이름은 원래 논현포대(論峴砲臺) 인근 갯마을의 지명이었다. 결핵요양원이 서 있던 연수동과는 거리가 꽤 있다. 그러나 요양원 인근에서 바라보면, 산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얕은 구릉들 사이로 갯고랑이 굽이쳐 흘렀고, 그 너머 어딘가에 범의 입이 바다를 향해 벌어져 있었다. 지금의 연수동 전체가 그 시절엔 바다였다. 아파트가 서 있는 자리, 도로가 깔린 자리, 지하철이 달리는 자리 — 전부 물 아래였다. 1940년 이후 이 땅은 세 번 죽고 세 번 다시 태어났다. 지금의 얼굴이 처음부터 이 얼굴이었다고 믿는 것은, 소가 풀만 먹는다고 믿는 것만큼 — 그리고 연수동이 원래 육지였다고 믿는 것만큼 — 위험하다.


 

 

도시는 흔적을 지운다 — 그런데 이름은 왜 남겨두는 걸까

 

지도를 펼쳐 인천 지하철 수인분당선의 역 이름을 천천히 훑어보십시오. 호구포(虎口浦). 범의 입이라는 뜻입니다. 공장 굴뚝과 오피스텔, 그리고 물류창고가 빼곡한 이 땅에 왜 굳이 그런 이름이 붙어 있는 걸까요. 도시는 종종 스스로 지운 것들의 이름만 남겨놓습니다. 어쩌면 그건 양심의 흔적일 수도 있고, 어쩌면 그건 기억력이 나쁜 쪽의 무심함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한국어에서 호구(虎口)는 범의 입이기도 하지만, 쉽게 속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합니다. 땅의 이력을 모르고 들어오는 매입자를 향해, 이 역은 처음부터 이름으로 경고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오늘은 그 이름이 어디서 왔는지, 그리고 그 이름 아래 어떤 풍경이 묻혀 있는지를 되짚어 보겠습니다.

 

 

2007년도 송도 신도시


조개고개와 소꼬리 — 지금의 신도시와 산업단지가 갯벌이던 시절

 

예전엔 송도유원지에서 6-1번 버스를 갈아타고 동막으로 들어가면, 버스가 멈추는 곳에서 길이 끊겼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길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것들이 이어졌습니다. 논길이었다가 밭길이 되고, 밭길이었다가 소 하나 겨우 지나는 소로가 되는, 그런 길이었습니다. 동막 초입 '조개고개' 고갯마루를 넘으면 영락원이 있었고, 거기서부터는 그 길들을 한참 걸어야 했습니다. 발이 어디를 밟고 있는지 살피다 보면, 어느 순간 소나무 숲 사이로 흰 건물이 조용히 나타났습니다. 결핵요양원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길의 설계가 절묘합니다. 논길 밭길 소로 — 찾아오는 사람을 세 번 걸러내고 나서야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는 건물. 치료를 받으러 오는 환자에게 그 길이 희망이었는지, 아니면 마지막 관문이었는지는 — 걸어본 사람만 알았을 것입니다.친구와 함께 소를 끌고 갯벌로 내려가면 깊은 갯고랑이 있었고, 정신없이 놀다 보면 어느덧 갯고랑에 물이 차오르는 것도 잊은채 칠게등을 잡다고 물이 차오를 때는 소꼬리를 붙잡고 건너는  위험천만한 일도 있었습니다.

 

어른들은 갯벌에서 동죽을 몇 자루씩 캐서 소 등에 싣고 올라왔습니다. 그나마 여인들은 머리에 이고 양손에 가득 들고  그 갯벌을 걸어서 나왔습니다저녁이 되면 해감도 없이 불 위에 올려 구워 먹었고, 그 결과는 대개 예측 가능했습니다. 그래도 그것이 여름이었습니다.그런데 어느 날, 소가 그물에 걸린 숭어를 집어 먹는 장면을 목격하고는 풀만 먹는다고 믿었던 소가, 조용히 물고기를 씹고 있던 모습을 본 것이  세상에 대한 첫 번째 배신감이었습니다. 뒤돌아보면 그때 이미 이 땅이 무엇인지를 배웠는지도 모릅니다. 보이는 것을 믿지 말라고.

동죽 채취 모습
갯벌의 칠게

 

하얀 호텔 — 김정호가 노래를 다듬던 바닷가 요양원

 

지금의 적십자 병원 쯤으로 기억되는 요양원은 전국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곳이었습니다. 1940년 설립된 한국 최초의 적십자결핵요양원, 연수장(延壽裝). 32,000평의 부지, 3,000평의 소나무 정원, 그리고 그 너머로 보이던  염전과 호구포,  그리고 그 넘어  소래 포구 등

 

서울대 출신 의료진이 있었고, 전국에서 환자들이 치료를 받으러 왔다고 했습니다. 1983년에는 천재 가수 김정호님도 이곳에서 치료를 받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어릴 적 아이들은 "김정호가 저 안에 있다더라"는 말을 들으며 괜히 담장 주변을 서성이곤 했습니다. 멀리서라도 한번 볼 수 있을까 싶어서였지만, 요양원은 조용했고 담은 높았습니다.

 

사람들은 이 건물을 '하얀 호텔'이라고 불렀습니다. 흰 외벽과 소나무 숲, 해변이 어우러진 그 풍경이 더는 병원처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겠지요. 그러나 그 아름다운 이름 안에는, 살아 돌아가고 싶었던 사람들이 가득 있었습니다. 요양원이란 본래 그런 곳입니다. 아름다운 외피 안에 필사의 시간이 들어 있는 곳.

 

송도 매립초기 현장

 

 매립이라는 이름의 망각 — 바다는 어떻게 사라졌는가

 

세월이 흘렀습니다. 바다는 사라졌습니다.갯벌은 매립되었고, 해안선은 밀려났으며, 그 위에 남동국가산업단지와  송도신도시가 들어섰습니다. 지금은 대형 화물차들이 오가고 아파트 단지와 공장 굴뚝과 물류창고가 빼곡합니다. 호구포역에서 내린 사람들은 산업단지로 출근합니다. 요양원 쪽에서 바라보이던 범아가리, 범의 입처럼 움푹 들어갔던 그 포구는 지금 지하철역의 이름 속에만 남아 있습니다. 이름이 기억하는 것을, 땅은 이미 잊었습니다.

 

연수장 부지는 1993년 연수구 택지개발 지정으로 「택지개발촉진법」에 의해 공공수용됐습니다. 수용된 10,000여 평은 도로와 근린공원으로 용도가 변경됐고, 의료기관은 1996년 숭의동과 연수동이 통합되어 현재의 인천적십자병원으로 이어졌습니다. 2019년에는 구 요양원 건물이 장례식장 증축을 위해 철거됐습니다. 건물의 마지막 용도가 장례식장이었다는 것 —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이실지는 이글을 읽고계시는 여러분께 맡기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는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공간은 사라져도, 공간이 품었던 용도의 결(結)은 끝까지 남는다고.

 

송도 신도시

 

땅은 마지막에 말한다 

 

세상에는 세 종류의 증인이 있습니다.거짓말하는 증인, 침묵하는 증인, 그리고 — 묻는 자에게만 말하는 증인.지도는 첫 번째에 가깝습니다. 현재만 보여주면서 그것이 전부인 양 으시대기 때문입니다. 등기부는 두 번째에 가깝습니다. 읽을 줄 아는 사람 앞에서만 입을 여는 까닭입니다. 그리고 지반(地盤)은 세 번째입니다. 묻지 않으면 영원히 침묵하고, 물어도 천천히, 아주 천천히 대답합니다.

 

문제는 그 대답이 돌아올 때쯤이면 — 계약서에 이미 도장이 찍혀 있다는 것입니다.매립지는 인내심이 깊습니다. 수십 년을 조용히 버티다가, 어느 봄날 건물 모서리 하나를 살짝 기울이는 것으로 첫 인사를 건넵니다. 그 인사가 반갑지 않은 이유는 — 그것이 인사가 아니라 청구서이기 때문입니다.저는 이 땅에서 태어나 자라서 부동산 일을 해오고 있습니다. 그 세월이 가르쳐 준 것은 많지 않습니다. 단 하나입니다.땅을 사거나 공장을 매수하기 전에  땅에게  먼저 물어보라는 것.

 

1. 너는 원래 무엇이었느냐  -  지반정보포털(geoinfo.kr)이  시추 기록으로  답을 합니다.

2. 누가 너를 수용했고,  보상은 끝났느냐  -  토지이용계획서(luris.go.kr)가  환지 이력으로  답합니다.

3. 네 위에  서 있던 건물은 어떻게  사라졌느냐  -  세움터(eais.go.kr)의 멸실 기록이 답을 합니다.

 

송도신도시 전경

 

이 세 가지 질문을 생략한 매입은, 해감 없이 구운 동죽과 같은 배아프고 화장실가는 결말을 예약하는 일입니다. 동죽이 문제가 아닙니다. 묻지 않은 것이 문제입니다. 갯벌은 원래 침묵으로 말합니다. 물이 들어올 때는 조용하고, 물이 빠질 때도 조용합니다. 다만 그 침묵 아래에서 무언가는 언제나 움직이고 있습니다.

 

 매립된 땅도 다르지 않습니다. 콘크리트를 덮었다고 갯벌이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다만 더 깊이 숨었을 뿐입니다. 범의 이빨을 뽑은 자들은 그 다음 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돌아섰습니다. 그러나 땅은 기억합니다. 천천히, 끝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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